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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인생, 혼자 살아 뭐 하니?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꿈의 제인
이영주 시민기자  |  wizaar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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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8호] 승인 2017.06.12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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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훈 감독|2017년 개봉

함께 살던 정호 오빠가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소현(이민지)은 오빠와 함께 살던 모텔에서 받을 사람 없는 편지를 쓴다. 모텔 욕조엔 소현의 손목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액체가 무늬를 그리며 퍼져나간다. 흐릿해진 정신 너머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굴까? 멋지게 웨이브 진 금발머리에 짙은 속눈썹, 빨간 입술의 여자. 아, 아닌가? 굵은 목소리로 정호를 찾는다.

가출소녀 소현과 트랜스젠더 여성 제인(구교환)은 그렇게 만나 가족이 된다. 제인은 소현 말고도 지수와 대포, 쫑구를 데리고 사는 가출 팸의 엄마다. 다른 가출 팸처럼 돈을 벌어오라 시키지도 않고 폭력도 쓰지 않는다. 제인은 밤마다 트랜스젠더 클럽에 나가 노래를 부르며 번 돈으로 부양가족(?)을 먹여 살린다.

제인의 가출 팸은 갑작스런 제인의 죽음으로 해체된다. 다시 혼자 남은 소현은 또 다른 가출 팸에 합류한다. 새로운 팸의 가장인 병욱은 소현을 겁박하기 일쑤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내성적인 소현은 같이 사는 팸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 그래도 혼자보다는 낫다. 제인의 팸처럼 편안하지도 않고 폭력적이기까지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싶다. 간절하게.

   
 
영화 전반부 제인의 가출 팸과 후반부 또 다른 가출 팸에서 지내는 소현의 모습이 나오지만 시간 순은 아니다. 제인의 가출 팸에서 함께 지냈던 지수와 대포를 병욱의 가출 팸에서 다시 만나지만 이전에 서로 알던 사이가 아니다.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소현의 환상인지 뚜렷하지 않다. 기존의 사고체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전개다.

어쩌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돌이표. 마치 반복인 듯 반복 아닌 반복 같은 외로움. 조현훈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 ‘꿈의 제인’은 가출 팸을 다루고 있지만, 집을 나온 청소년들이 왜 집을 나왔는지 집을 나와 어떻게 사는지, 사회면 뉴스에 나올 법한 사연에는 관심이 없다. 지독히 외로운,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그러나 사람들이 믿지 않는, 어떻게 해야 같이 살 수 있는지 도통 모르겠는 두 사람. 전혀 다른 듯 닮은 소현과 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가출 팸들의 메마른 일상은 금방이라도 퍼석거리며 부서질 것 같이 위태롭고, 지독히 외로운 존재들의 걸음은 매순간 휘청거린다. 시시때때로, 마치 일상처럼 끔찍한 사고가 잇따른다. 홀로 있기 싫어 모여 살지만 삐죽삐죽 가시 돋친 존재들은 서로 상처가 된다. 가장 강단 있고 정이 넘치던 지수(이주영)가 가진 소박한 꿈마저 삭막한 구덩이에 내던져진다. 가시에 찔려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박차고 떠나지 못하고 어떻게든 함께 있기를 바랐던 소현은 끝내 홀로 버려진다. 지독하게 외롭다. 무섭고 끔찍하다.

그러나 영화 전반에 흐르는 공기는 따뜻하다. 가출한 청소년들을 왜 데리고 사냐는 소현의 물음에 제인은 답한다. “불행한 인생 혼자 살아 뭐하니. 그래서 다 같이 사는 거야” 무심히 툭툭 내뱉는 제인의 말이 팽팽하게 긴장해있던 마음의 근육을 노곤하게 풀어준다. 제인의 말대로 인생은 불행 그 자체이지만, 아주 가끔 어쩌다 한 번 행복한 순간이란 게 있으니까. 토닥토닥. 소현을, 나를 위로한다.

그래서 영화는 끔찍한 악몽 같기도 하고 깨고 싶지 않은 단꿈 같기도 하다.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든다. 이게 다 제인 덕이다. 꿈을 꾼 듯 몽롱한 상태로 극장을 나서며 제인의 대사를 읊조린다.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한 인생 오래오래 살아요”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환상이든, 두 팸 모두 누군가의 죽음으로 해체되고 도돌이표처럼 소현은 또 다시 혼자가 돼 수신자 없는 편지를 쓴다. 그러나 처음에 편지를 쓰고 스스로 손목을 그었을 때의 소현과는 조금은 달라져 있으리라 믿는다. 여전히 외롭고 혼자인 게 두려운 소현이지만, 꿈처럼 떠오르는 제인의 노래를 기억하므로. 여전히 불행한 인생이지만,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야지. 불행한 인생이니 혼자 살지 말고 우리 함께.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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